교회 소개
서울교회 소개
서울교회의 철학
서울교회가 있기까지
주요활동
교회 오시는 길
교역자/장로
원로목사 소개
담임목사(직무정지중)
교역자 소개
장로 소개
선교사 소개
예배 안내
예배 및 집회시간 안내
교회 소식
교회행사/소식
모임/교인소식
순례자
언론에 비친 서울교회
주간기도
서울교회 사태 뉴스 / 동영상
Home > 교회소식 > 컬럼
2020-05-17
어머니의 겨울
가정의 달 특별기고

달빛마저 꽁꽁 얼어붙은 동짓달 밤에, 눈 쌓인 무섬 댁 돌담길을 돌아 마실 가셨다가 잠든 막내인 나를 업고 귀갓길 서두르시는 엄마, 무릎 밑으로 파고드는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에도 어린 것 추울세라 연신 담요를 치키시며 내딛는 발소리. 그 뽀드득뽀드득하는 눈 밟는 소리에 선잠을 깬 막내의 눈에 언 듯 비친 그림자 하나, 우리를 계속 따라오는 하얀 눈 위에 너무도 선명하고 새까만 그림자 하나. 엄동설한 어머니 등에 업혀 눈만 빼꼼히 내밀고 어머니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던 그 흑백 동영상의 이미지는 나의 뇌리에 또렷이 스캔되어 저장되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어머니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서울 유학 중이던 맏아들이 혼자 객지에서 고생한다고 가족이 영주에서 서울 마포에 집을 사서 올라왔던 것이 1950년 봄이다. 하필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스스로 불구덩이를 찾아 올라온 격이었으니 한 집안의 가정사로 볼 때 이런 불운이 또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전쟁 중에 맏아들을 잃어버리고 혼이 반쯤 나간 채 부모님은 허둥지둥 남은 가족을 이끌고 피난 행렬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 집을 장만하느라 고향의 전답은 반으로 축나 버렸다. 가을이면 농자금 갚으랴 자식들 학자금 마련하랴 추수한 곡식을 장에 내다 팔고 나면 대가족이 한 해 동안 먹고 살 식량을 걱정해야 했던 것이 부농이라 불리는 집안의 실상이었으니 살림의 지혜를 짜내야 하는 일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대학 4학년 졸업반 시절, 한국산업은행 입행 시험을 하루 앞둔 1972년 겨울에 고향에서 ‘모친위독’이라는 네 글자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큰 수술을 받으신 후였지만 예상 밖이었다. 혹 어머니를 못 뵈면 어쩌나 싶은 초조함 속에 시험을 마치고 중앙선 하행 열차를 탔다. 밤늦은 시각에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 계셨다. 막내가 왔노라고 귀에 대고 몇 번을 소리치며 어머니를 깨웠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힘없이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셨다.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으셔서 들리지 않는 소리로 “... 왔니...” 라고 인사하시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 몇 분 후 어머니는 다시 자리에 누우셨고 나도 곁에 같이 누웠다. 너무 피곤해서였던지 나는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왜 좀 더 깨어 있지 못했을까! 새벽 즈음이었는지 어머니는 조용히 홀로 영면하셨다. 바로 옆을 지키고 있었으면서도 마지막 가시는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죄스러움은 그 후로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늘 자식들을 걱정하시면서도 항상 “나는 괜찮다, 괜찮다” 하시던 어머니. 환갑 무렵 갑자기 병환이 너무 깊어진 걸 알고 뒤늦게서야 수술을 받으셨지만 이미 너무 쇠약해진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자식으로서 어찌 그렇게 무신경할 수 있었는지 너무 한이 되고 죄스러웠다.
100원짜리 지폐 2장에 동전 몇 닢이 들어있던 어머니의 지갑은 지금까지 정성껏 보관하고 있다. 100원짜리 지폐가 혹 상할까 손수 만드신 비닐 봉투에 고이 넣고 다니셨으니 어떻게 그 돈을 쓰기나 하셨을까? 나는 가끔 어머니의 손때 묻은 지갑을 꺼내어 만져보면서 작은 돈까지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셨던 무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보곤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어머니 생전에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을 떠올리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작은 금니가 살짝 드러나 보이던 어머니의 환한 미소 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은 어머니의 겨울이 길고 추웠기 때문일까?

박찬성집사(1교구)